제1논문 – 선과 악
니체는 선을 두가지 경우로 정의한다.
- 탁월하고 본능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지향하는 선
- 노예도덕: 전사/귀족 세력에 핍박받은 기독교적 노예의 저항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는, 자신의 고통의 책임을 전가하기위해 만들어진 도덕체계 (ressentiment)
첫번째 도덕은 강한 자, 남에게 자신의 가치평가를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인간의 선인 반면, 두번째 도덕은 전사/귀족 세력에 핍박받은 노예와 같이 밖으로 표출할 수 없는 고통으로 빚어진 도덕체계이다.
니체는 노예도덕의 기원을 수직적 사회계층에서 찾는데, “도덕의 계보학”에서 매우 논리적으로 노예도덕의 발전을 서술한다. 자신보다 강한자에게 억눌린 약한 자는 자신의 동정, 본능, 고통 등을 밖으로 표출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감정들은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해지고,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병’ 양심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기보단 단지 이런 고통을 견디기 때문에, 이것이 옳은 것이며, 도덕적이다 – 선하다 – 라는 사고방식자체를 노예도덕을 가진 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고통을 해소할 방안을 찾기보다는 이것을 참고, 참을 수 밖에 없다는 판단하에 이것을 옳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렸다는 주장이다.
강한 자를 상대하기위해 노예도덕가들이 만들어낸 계층은 성직자계층이다. 현실에서 맞싸울 수 없는 강한 자들에대한 복수심, 저주는 향할 곳이 없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복수는 상상으로 행해지는데, 자신을 선하다고 정의해버린 성직자들은 강한 자가 악하다는 정의를 내리고 악함은 강하고, 대신 선함은 약하고, 유순하고, 가난하며, 힘없고, 병들었고, 동정한다, 로 표현한다.
제2논문 – 죄책감과 양심
니체는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것이 고통, 동정에 대한 치유라고 여긴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바로 기억력인데, 이것은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다. 기억, 혹은 책임은 사회 전체로 볼 때 관습의 형태로 남게 되는데, 앞서 설명한 노예도덕도 관습의 형태로 남는다. 강한 자들은 자신의, 또한 남의 고통, 동정 등의 ‘실수’를 기억하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고, 이런 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관심이 없기때문에 자연스레 잊혀지는 것이다. 하지만, 노예도덕가들은 남과의 약속, 남이 자신에게 지는 책임을 기억하고,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 처벌의 형태로 고통을 주려한다. 이것을 정당화하기위해 만들어진 장치가 바로 양심이자 죄책감인 것이다. 제 1 논문에서 설명된, 고통, 동정, 본능의 내면화가 양심과 죄책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니체는 제 2 논문에서 형벌의 기원과 의미가 맞닿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즉, 형벌의 기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을 죗값을 치르고 계몽시키는”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인데, 이것은 곧 형벌은 도덕성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형벌은 단지 화를 표현하는 장치일 뿐 그 이상, 또는 이하의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형벌에서 받는 고통으로 단지 정신적 배상을 받는 것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 2 논문은 채권자가 형벌로 받는 고통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드리며, 이것은 채권자를 계몽하거나 죄를 깨우치는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서술한다. 형벌은 단지 새디스틱한 인간본능을 충족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니체는 나아가 신의 개념의 기원도 설명하는데, 신은 단지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혹은 니체의 ‘안티그리스도’에서도 주장되듯이) 인간 사회가 강해짐에따라 조상에게 그 공을 돌리기 위한 장치인데, 인간 사회가 점점 밀집되고 강해짐에따라 (이것의 이유를 꼭 조상에게서 찾을 필요는 없다) 조상의 그림자는 신의 그것과 맞닿게 된다.
제3논문 –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의 유명한 구절 “인간은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한다”이 나오는 논문이기도 하다. 니체는 금욕적 이상의 영향을 여러 계층 (예술가, 철학가, 여성, 병, 성직자, 성인)에대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니체는 금욕적 이상이란 이러한 계층에게 그 목적의식이란 힘을, 혹은 허무할 수 밖에없는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쥐여주는 장치일 뿐, 그 자체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니체가 왜 매독증상을 보였는지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니체는 성직자의 금욕적이상을 가장 신랄하게 공격한다. 성직자는 인간을 병들게 한다. 성직자는 인간에게 조그만 것에서, 단순노동에서, 집단생활에서 행복을 느끼라한다. 이것을 가능하게하기 위한 성직자의 무기는 자신의 금욕, 죄책감, 그리고 양심이다. 죄책감과 양심은 병든 자를 더욱 병들게 한다. 자신이 느끼는 본능을 밖으로 배출해야하지만 그것을 내면화 함으로 해서 병든 자는 더욱 병들게 된다. 이 내면화를 성직자는 죄와 고통의 관계성을 성립시킴으로써 이룬다. 고통이 자신의 죗값이라는 연결고리는 기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본능의 내면화이고, 이것은 정상인을 병들게 하는, 죄책감과 양심을 이용한 인간을 길들이는 행위이다.
결국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을 통해 독자에게 하고싶은 말은 무엇일까? 도덕이 단지 고대사회의 노예와 귀족/전사 사이 갈등으로 빚어진 결과물이며 종교, 혹은 인간을 교리화하기위해 사용된 도구라는 그의 판단은 우리가 도덕에 얽메이지말고, 진정한 의미의 강한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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